광주진흥고등학교 야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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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광주일고, 광주동성고에 이어 광주광역시에 있는 3번째 고교 야구부. 셋 중에서 역사가 가장 짧고 우승 기록도 셋 중에 가장 적기는 하지만[3] 그래도 4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KBO 리그에서 스타가 된 졸업생도 눈에 띄게 보이는 학교다. 특히 투수,포수는 특급선수 배출을 많이 해냈다. 임창용,김진우, 나성범(투수출신), 양의지, 문동주등이 있다.
2. 연혁[편집]
전국적인 고교야구 붐이 일기 시작하던 1973년에 창단했다. 우승의 기회는 비교적 빨리 찾아와 1977년 봉황대기 결승에서 충암고와 만났는데[4] 당시 창단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팀 간의 대결은 충암고의 승리로 돌아갔고 광주진흥고의 첫 우승 기회는 그렇게 날아갔다. 그 후 1981년 황금사자기에서 훗날 가을까치로 불리는 김정수의 호투를 발판삼아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그 해 상대는 성준과 류중일이 버티던 최강 경북고였고, 결국 다시 준우승으로 만족해야 했다.
1985년과 1986년 김기태(광주일고-인하대)를 제치고 해태의 1차 지명을 받은 것으로 유명해진 오희주[5] 를 앞세워 결승에 도전했지만, 두 해 동안 치러진 세 차례의 전국대회 결승에서 모조리 패하면서[6] 에 패배 창단 후 30년간 5번의 준우승에 그치면서 콩라인에 가입하게 된다. 1990년대 해태는 이대진, 임창용, 김상진 같은 광주진흥고 출신 투수들을 받아들이면서 투수력의 새 피를 수혈했지만, 정작 이들의 고교 시절에는 팀을 정상권으로 이끌기에는 전력이 많이 모자란 상황이었다.
광주진흥고의 콩라인 탈퇴를 이끈 선수는 김진우였다. 고등학교 2학년 신분으로 2000년 봉황대기에서 순천효천고를 꺾고 팀을 첫 정상에 올려 놓으면서 이름을 알린 김진우는 1년이 지난 후에 더욱 일취월장한 기량을 선보이면서 일약 초고교급 선수로 등극하였다. 2001년 대통령배 결승에서 성남서고를 제압하고 우승을 이끌었고, 바로 이어진 청룡기에서는 피로 누적으로 무너지는 바람에 덕수정산고[8] 에게 패배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광주권에서도 항상 넘버 3로 밀리던 광주진흥고의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충분했다.[9]2000~01년 광주진흥고 재학생이 회상한 추억
그리고 2006년 또 하나의 초고교급 선수인 정영일을 앞세워 청룡기 정상에 도전했지만, 무식한 혹사[10][11] 를 견딘 정영일의 역투에도 불구하고 팀은 경남고의 신본기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며 패하면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고, 정영일은 그 뒤 부상으로 신음하기에 이르렀다. 정영일의 시대 이후 한동안 고전하던 광주진흥고는 2012년 고교 2학년이던 하영민을 앞세워 깜짝 우승에 성공하며, 통산 3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에 성공했다.
그 뒤로 침체기를 겪었던 광주진흥고는 2020년 황금사자기에서 2회전에서 상우고, 16강전에서 중앙고를 꺾은데 이어 율곡고와의 8강전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오랜만에 전국대회 4강에 올랐다. 그러나 결국 모든대회 통틀어서 첫 4강이었던 김해고를 상대로 0-3으로 패배하며, 오랜만의 4강 진출인 점에 만족해야 했다.
광주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우승 3회(1995,1996,2006), 준우승 1회(2005)를 기록했다. 대구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우승은 없고, 준우승 1회(1992)를 기록했다. 부산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우승 1회(2008)[12] , 준우승 2회(1999,2005)를 기록했다.
광주 지역 3개 고교 중 유일하게 전용구장을 보유하고 있다.[13] 광주일고와 광주동성고는 일반 학생들과 운동장을 공유한다.
3. 출신 선수[14][편집]
4. 역대 감독[편집]
김규영(1973)
서용선(1974)
박인규(1975)
허양옥(1976)
백대삼(1977-78)
김기홍(1979)
황진설(1980)
김광배(1981)
도영권(1982)
김학용(1983)[19]
강의원(1984-88)(1991-1997)(1999-2004)[20]
이성열(1989-90)[21]
강풍원(1998)[A][22]
박병준(2005)[23]
박철우(2006)[24]
최재영(2007-13)[A] : 16회[25]
윤현필(2014-18)[A] : 17회
오철희(2018-2022)[A]
김인호(야구)(2023~현재)[A] : 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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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대 메이저 + 협회장기[2] 나무위키 등록 선수 한정, 졸업 연도순[3] 국내 고교 야구부에서 광주진흥고와 비슷한 지역 내 포지션에 있는 학교가 인천 제물포고다. 다만 팀의 기록은 제물포고 쪽이 더 열악한 편.[4] 이 당시 충암고의 감독이 김성근이었고 충암고 주전 포수였던 조범현이 이 대회 최우수선수에 뽑히게 된다.[5] 우완투수로 한양대에 진학했다. 천하의 김응용 감독과 첫 대면에서 반짝이 옷에 파마머리를 하고 나왔다고 한다. 김응룡 감독이 스카우트 팀장에게 "유명한 가수신가?"라고 물었고 오희주는 속으로 "이야, 해태에 적응하기 어렵겠다" 싶다고 한다. 결국 해태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고 2년 후 LG 트윈스로 이적했다.#[6] 1985년 제39회 황금사자기 준우승(2-9, vs 전주고), 1986년 제40회 황금사자기 준우승(1-2, vs 군산상고), 1986년 제16회 봉황대기 준우승(vs 부산고)[7] '00년까지는 모자와 유니폼 줄무늬가 남색이었으나 '01년부터 흑색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8] 덕수와의 결승전 전날인 성남고와의 준결승에서 김진우가 분전하느라 힘이 빠졌다. 덕수에는 3학년 에이스 투수 류제국, 신입생 톱타자 외야수 이용규, 거포 최진행 등이 있었다.[9] 당시 광주진흥고 라인업은 투수 김진우(해태 입단), 포수 이원희(대불대 진학), 1루 이상오(중앙대 진학), 2루 조용원(한양대 진학), 3루 김경선(고려대 진학), 유격 손주인(삼성 입단), 외야 최길환(한양대 진학)-최근호(중앙대 진학)-양기성(영남대 진학) 등 3학년생 주축이었으며, 양기성 자리에서 대신 2학년 단신 좌타자 김재천(SK 입단)이 활약했다.[10] 청룡기에서의 등판 기록이다. 2006. 5. 30. 32강전 성남서고 8과3분의2 121개 투구→2006. 6. 2. 16강전 대전고 8이닝 122개 투구→2006. 6. 4. 8강전 충암고 9와3분의2이닝 159개 투구→2006. 6. 6. 4강전 덕수정보고 8이닝 117개 투구→2006. 6. 7. 결승전 경남고 16회(기록상 15회)222개 투구. 경남고등학교는 16회까지 이상화와 이재곤이 나눠 던졌다.[11] 당시 감독인 박철우가 비난을 많이 받았다.[12] 여담으로 지역라이벌인 광주일고와 광주동성고는 화랑대기를 단 한 차례도 차지하지 못했다.[13] 운암동 시절에는 야구장이 없었으나 신창동으로 이사하면서 교내에 야구장 부지를 따로 마련했다.[14] 나무위키 등록 선수 한정, 졸업 연도순[15] 과거 일본 간사이 독립리그에 참가했던 팀. 이름에 서울이 들어간건 재일교포 및 한국인들로 구성된 야구팀이었기 때문이다. 간사이 독립리그가 자금난, 구성원간의 갈등 등으로 해체된 후 서울 해치도 해체되었다.[16] 이종범의 조카. 윤대영에서 윤형준으로 개명했다.[17] 2019년은 음주운전 적발로 인해 임의탈퇴 처리되었고, 2020년부터 선수단에 복귀했다.[18] 최해식의 아들. 최상인에서 최우재로 개명했다.[19] 인천동산고와 동국대를 졸업했으며 동산고, 광주진흥고, 동국대 감독을 역임했다. 동산고 제자는 위재영, 정민태, 송지만, 송은범, 정상호, 류현진, 권윤민, 동국대 제자는 한대화, 김성한, 김민호(롯데), 박준태, 강길용 등이 있으며 수많은 우수선수들을 길러냈다.[20] 광주진흥중 감독, 광주진흥고 감독, 광주진흥고 야구부장 등을 맡으면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광주진흥고 체육교사를 겸임했다.[21] 훗날 유신고등학교 야구부에서 장기간 재직하며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고 2022년까지 지도자로 활동했다.[A] A B C D E 모교 졸업생[22] 광주진흥고 동기인 김경배, 김정수와 함께 연세대로 진학했다.[23] 목포 영흥고등학교 감독 역임[24] 이 해에 정영일의 혹사로 문제를 일으켰다.[25] 광주진흥고 동기인 고형욱은 2007년에 중앙고 감독을 맡아 중앙고를 대통령배 및 무등기 4강으로 이끌었으나 중앙고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감독에서 물러난 바 있다.